1. 침잠하던 중 : 내 마음의 길을 곧게 내라고 배운다.
2. 가라앉음 : 심리적인 세계가 아닌 현실의 물, 바닥에 내려간다. 두려워 닿지 못했던 감각.
3. 떠오름 : 내면의 심상을 보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인다. '나는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사실이 필요한 사람이다. 사랑이 중요한 사람이다.'. 이제야 떠오를 수 있다.
3. 성숙의 침잠 : 혼자서 고뇌하는 시간동안 부정적인 감정에 휩쌓이지만, 선의를 베푸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다.
자만이 아니라 정말로 극복했다면 세상의 나의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간다.
내가 극복한 그 방법을 나눈다.

외부 탓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지 알고, 세상의 요구를 안다.
그 정반합 과정에서 나온 결론, 내면의 목소리를 믿는다.
나는 어떻게 해야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어렵고 멸시받고 외롭고 우울하고 화나고 차별받고 그 모든 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사랑을 베풀고,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이다.


물은 외로움, 우울함, 무기력한 상태
세례는 심적 우울함, 무기력을 체감하게 해 현실감을 경험하게 해주며, 그 과정에서 물 위로 끌어올려주는, 도움받는 경험.
하늘은 자신이 작아지는 경험
비둘기는 하늘에서 자신에게 내려와주는 대상. 감각하게 해주는 대상.
광야는 외로운, 고뇌하는 상태, 이상상태가 아닌 더 깊어지고 성숙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내면의 공간, 가득 차 있던 것이 비워지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곳.
들짐승은 내면의 야생상태
사탄은 부정적 경험, 욕구와 공격성의 내부화, 자살의 유혹.
천사는 세상의 도움, 사랑받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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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전에는 제목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
뭔가 특급 살인이 일어났다는 느낌인데, 원제는 Murder on the Orient Express
다보고 의미부여하면 제목이 더 와닿는다.

주인공인 푸아르 탐정은 두개의 달걀이 대칭을 이루지 않아서 밥을 못 먹고 한쪽 신발에 똥이 묻었다고 다른 쪽도 더럽히는 사람으로, 항상 질서와 체계, 동등함을 추구한다.

라쳇(조니뎁)의 식사를 같이하자는 제안을 선약 때문에 거절한 푸아로 탐정.
이후 티타임은 혼자 책을 보며 웃고 있자, 라쳇은 불쑥 찾아와 합석하며 말한다.
"You know, dessert is an indulgence, and I feel kinda silly and stupid indulging alone."
> 알다시피 디저트는 "맘껏 즐기도록 허락된 것"인데, 혼자 즐기려니까 좀 한심해보이더라구. (너처럼ㅋㅋ)
영감에 대한 조롱처럼 느껴지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조롱을 같이 하고 있다. 둘다 못나보이게 만드는 자학/가학적인 유머.
그런데 Indulgence가 카톨릭에서는 소위 면죄부로 알려져있는, "대사"의 의미가 있다. (죄에 대한 벌을 대신 사해준다.)
dessert는 죄의식에서 풀어주는 느낌일까? 당과 지방에 대한 불편감같은 것 말이다.
벌써 죄를 고백하고 있다.

제가 신부도 아니고, 죄가 없으셔야 대신 해드리죠?

과한 해석인가? 이후 대사에서는 라쳇이 탐정에게 "무고한 자의 복수자"라는 일을 '대신' 해주길 제안한다.
무고하냐는 질문에 자신은 "사업가"라고 한다. 감정인들이 잘못해서 문제가 생겼다며, 자기 잘못은 아니라고 한다.
한참 자기 고백을 하고 자신을 보호해달라는 라쳇. 탐정의 거절에 대해 돈으로 회유하고 총으로 협박하지만, 탐정은 그의 얼굴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다며 명확히 의견을 말한다.(자넨 이 영화 아니였으면 해적이였을거야...)
라쳇은 그래도 자기 케이크(어쩌면 고해성사)는 마음에 들었냐고 묻고, "Perfect"했다고 한다.

기차가 터널을 지나가다 쌓인 눈 때문에 탈선하고,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게 된 상황.
에스트라바도스(선교사)는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할지, 루시퍼처럼 떨어질지 주님 뜻에 달려있다는 말을 한다.
라쳇은 12개의 깊이가 다른 자상을 입은채 사망한다.
의심하며 갖가지 인종차별을 기반으로 투사하는 장면들.
탐정은 범죄자의 이상행동을 감지할 줄 안다. 영혼에 균열이 생길 정도가 돼야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믿는다.

[데이지와 관련된 이야기는 스포니까 어느정도 생략]
우리의 정의로움, 양심은 어디갔는가? 데이지(순결)의 죽음과 함께 죽어버렸고, 묻어버렸다.
상처받은 자로 대변되는 우리의 감정에는 치유가 필요하다. 안식, 구원이 필요하다. [12사도와 예수]
탐정으로 대변되는 우리의 이성은 불균형을 감당하는 법을 배워야한다.
* 찌르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의 자리에 있는 할머니인가? 종교적 해석은 내공이 부족하여 ..

해가 떠오르는 곳, 탐정은 구원된 기쁨을 기념하는 중이다. "He is on Holiday"

이 영화는 정의와 구원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무엇을 '옳은' 것이라고 정할 것인가? 살인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
파스칼의 말처럼, 피레네 산맥 이쪽에서의 정의는 저쪽에서는 불의이다.

Orient : 해가 떠오르는 곳이기에 우리가 지향하는(Oriented) 곳이 되고, 근원적인(Original) 질문을 하게 만든다. 때로는 강렬한 태양에는 그림자가 길어지듯이, '서양인'에게 '동양'이라는 다른 지점은 때로는 불쾌한 자신의 어둠을 투사하여 차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Orientalism).

누군가의 Orient는 어떻게 Express(press out)되는가? 말/상징/행동, 혹은 (범죄)사건으로 드러난다.
표면적으로는 카세티의 죽음, 데이지의 죽음. 내적으로는 순결하고 소중했던 마음의 죽음.
그 과정에서 얼어붙고, 탈선된 사람들. 이들에게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대신 용서(대사)를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가 지향하는(할) 곳을 명확하게 해줄 사람, 태양/구원을 향하는 급행열차를 태워줄 사람이 필요하다.

Orientation : 지남력의 뜻도 있었다.
 한 인간이 일상생활을 건전하게 영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처해 있는 입장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주위 환경 중에서 특히 자기가 처해있는 공간, 시간 및 상대하고 있는 사람을 구체적으로 인지하는 능력을 지남력(orientation)이라 하는데, 이것이 상실된 상태를 지남력상실(disorientation)이라고 한다. 예컨데, 교실에 앉아 있으면서 극장에 앉아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면 공간에 대한 지남력을 상실한 것이고,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밥 을 왜 안주느냐고 한다면 시간에 대한 지남력을  상실한 것이며, 자기 어머니를 보고 누이라고 부른다면, 이는 사람에 대한 지남력을 상실한 것이다.
+ 내 생각 > 나는 누구인가? 나의 오리지널이 만약 타인의 오리엔트에 의해 흔들린다면, 지남력상실의 위기-푸아로 말에 따르면 영혼의 균열-에 놓인다. 
(https://m.blog.naver.com/sandi3303/90101004515, 이정균, 1992: 107, 정신보건사회복지실천론 등- 확인해봐야함).


자 이제 우리의 이야기로 가져와보자.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지남력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움직여야하기 때문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태양을 바라본다. 어디에서 떠오르고 있는가? 그곳이 동쪽이다.
안을 정했기에 밖이 있듯. [법륜스님의 스승님의 가르침] 동쪽을 정했기에 서쪽이 정해졌다.
그리고 그것에 비해 한없이 작고 초라한 자신을 발견할 때, 죄책감을 느끼거나 분노가 나타나지 않는가?

우리는 방향을 정하고 싶은데, 이것이 사회 정의라고 하면 어려움이 발생한다.
정의롭고 질서가 있으면 좋겠다. 공평하길 원한다.
한 쪽을 정하면, 그것은 따르게 된다. 반대는 거짓,불의,악,왼손잡이,다른 지역의 사람이 된다.
그러나 내가 그의 입장에 서면? 이전에는 동쪽은 서쪽이 되고, 입장이 바뀐다.
내가 죄스러운 마음이 되고 그의 두려움을 공감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장막 속에 있다면, 어디를 지향해야할지 모른다면, 나는 무엇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말은 다시 돌아와 나를 죄인, 못난 사람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존 롤스, 무지의 장막]
그렇다면 어떻게 평화, Peace에 도달하는가? [Pax 평화의 여신, 범(汎), Pacfic 태평양]
세상을 돌다보면 만나는, 거대하고 평화로운 것. 아마 그것은 평평한, 보편적인 가치일 것이다.
자 이제 그럼 방향에서 높낮이로, 꼭 평평할 필요가 있나? 모난 곳은 산이기거나 골짜기이다. 독특성도 중요하다.
삶의 편함도 좋지만, 굴곡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힐링이 필요한 사람은 그곳을 가시고, 나는 나대로, 강점으로 산다.

+ 탐정은 왜 그렇게 정의를 고수하는 것일까? 아내와의 일이 있겠지? 나일강의 죽음에서 확인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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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상황은 어떤 상황인가?]

지금 이 상황은 Going down하는 상황인가요?

사람들은 안젤라의 쌍둥이 동생이 자살했다고 한다. 안젤라는 그럴리 없다고 하지만, 어찌 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마치 승강기가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 알 수 없는 상황처럼 문이 열려있을 뿐이다.
문지기에게 묻듯 존에게 묻는다. 그러자 막겠다고 말한다.

안젤라 : Hold on, Are you going down? (지금 이 상황이 구덩이로 내려가는 건가요?)
존 : Not if i can help it. (내가 할 수 있으면 안 그러고 싶어.)

승강기가 내려가는 것을 원하는 사람에게, 내가 그렇게 되는 것을 막겠다고 한다면, 재수없는 사람이겠지만,
바닥으로 떨어지는 자에게 그러지 않게 막겠다고 한다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상황인지, 상대는 또 누구인지, 그리고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그저 물어볼 뿐, 그리고 '잘' 들어볼 뿐.

어떤 감정일까? 뭐 이런 사람이 다있냐는 당황스러움인가?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안도인가?

> 이 구간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에서 "Going down"이 나온 구절을 찾아보았다.

욥기
33:24, 28
to be gracious to him and say, 'Spare him from going down to the pit ; I have found a ransom for him'-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He redeemed my soul from going down to the pit, and I will live to enjoy the light.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

> 고난 속에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중재해 줄 특별한 천사가 있고, 그는 사람들에게 옳고 그름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 사람들은 이 천사의 계시의 중보의 가르침을 따라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바른 길로 들어선다면 하나님을 천사를 향해 내가 그들의 대속물을 받았으니 그들이 죽음의 구덩이게 내려가지 않도록 건저 주어라고 명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https://m.blog.naver.com/hongjunseop/70152557260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가브리엘은 길잃은 어린 양을 인도해야한다는 말이 존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한다.
존은 구원받을 수 없는가? 적어도 가브리엘은 존을 구원할 수 없다.
동생 이사벨의 장례를 부탁하러 온 안젤라에게 자살은 죄악이고 율법상 안 된다는 신부.
안젤라의 동생은 구원받을 수 없는가? 적어도 율법상으로는 안 된다.

> JOHN: Still keeping your all-seeing eye on me, Gabriel? I'm flattered.
> Gabriel : I could offer how a shepherd leads even the most wayward of his flock, but to you it might sound disingenuous.
> 이 구절로 다음을 찾았다.
> 요한복음 John 10:3 The watchman opens the gate for him, and the sheep listen to his voice. He calls his own sheep by name and leads them out.
> 진정한 목자는 누구인가? 하나의 우리에서 여러 목자들의 양들이 섞여있다면, 자신의 양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정당하게 문으로 들어가, 양을 부를 때 양이 따르는 자이다.
> 누가 우리를 부르는가? 우리의 마음이 가는 방향은 어디인가?

[존이 죽어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15살 때부터 담배를 피웠거나, 살상을 많이 했거나, 가짜를 팔아서도 아니다.
사탄이 존의 영혼을 탐내고 있기 때문이다.


[방향을 가르쳐주세요]

나가시는 문은 이쪽입니다.


[World behind world]

천사, 악마, 혼혈종. superego, id, ego 인가?
혼혈종은 인간을 조종한다. 낮은 속삭임에 용기를 얻기도, 악몽을 겪기도 함.
천사와 악마의 손길은 우리 곁에 공존하고 있다고 하는데,
자기 눈에는 개소리라는 존.


[누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나?]

가브리엘은 고통을 이겨내야만,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을 견뎌내야만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타인을 희생시키려 한다. 본인이 감내하는 고통은 무엇인가? 존은 자신을 희생한다.
가브리엘은 자신이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아는가?


[파우스트적인 결말, 한 발 더 나아가기]

루시퍼와의 거래로, 이사벨을 천국으로 구원받도록 하고 존은 지옥을 택한다.
자기의 충동에 의한 자살은 구원받을 수 없으나, 타인을 위한 자살은 구원받을 수 있다.
자기만족을 추구하던 파우스트가 타인의 행복을 예상하며 구원받듯(죽어가듯), 존도 구원받는 결말이 예상되었다.
여기에서 비틀어지는 장면.
죽지 말고 살아라. 단기 희생으로 끝나지마라.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면서 구원받을 수 있음을 증명하라.
(칼뱅의 예정설 같다.)


[그래서]

처음의 질문. 지금은 어떤 상황인가? 선과 악의 교전, 그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삶.
우린 구렁텅이로 Going Down하고 있는 것일까?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방향을 알려주면 좋겠다.
신이 있다면, 그의 계획 하에 있는가? 아니면 그저 주사위 놀음이며 장난감인가?

어떤 생각과 믿음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하는가?
신은 있는가? 신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 중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신은 누구인가?
모든 건 신 혹은 나 자신의 계획 하에서 할 수 있다는 마음이 나를 더 평온하고 담대하게 만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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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던 중에
30대 중반을 향해 가는 중에
더이상 탓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자.
그동안 참 많은 탓을 해왔다.

나의 애착이 이모양인 건, 부모님이 편애를 해서 그랬다.
그런데 부모님도 힘들게 살았다. 그럼에도 잘산다.
여자친구도 좋은 사람 만났다. 그래서 여친 탓도 이제 못한다.
날 이끌어줄만한 좋은 교수님도 만났다.
형이 싫었는데, 좋은 형을 만나서 같이 잘 지낸다.

친구를 신뢰 못하는 건, 어릴 때 그 경험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연락 안해도 잊지 않고 해주는 친구가 셋이나 된다.
사회 탓하다가 도저히 안되서 성격으로 빠져들었다.
이제는 성격 탓이다. 내가 아니라 내 성격유형이 이 모양인 것이다.
회사가 어쩌구 저쩌구 했는데, 사실 내가 잘한만큼 대우해줬고, 난 그마저도 탐탁치 않았다.
정부에서는 교육도 용돈 줘가며 해줬고, 뭐 좀 해보겠다고 했더니 창업지원금도 줬다.
일도 안했는데, 코로나라고 지원금도 챙겨준다.
남들은 빚내면서까지 주식투자해서 돈을 번다. 나는 안하기로 선택했다. 돈 못 버는 것도 내 탓이다.

이제는 더이상 정말 탓할게 없다.
내가 탓할 시간에 남들이 잘살아서가 아니다.
그냥 더이상 어느새 다들 잘지내고 잘해줘서 내가 불만가질 곳이 없다.
받은게 없다고 탓할만한 방어가 모두 깨져버렸다.
바람이 쌩쌩 불어서, 코트를 껴입고 있었는데, 햇빛이 쏟아지니까 덥고, 옷은 벗어야한다.
그런데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없다. 발가벗어야한다.

이제 남은건 커다란 책임감.
나를 스스로 책임지지 않고 있다는 잔혹한 진실.
가난하게 죽는 건 내 잘못이라는 말이 얼마나 잔인한가.

이제 내가 뭘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난 움직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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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내 복지를 챙길 이유도 여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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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버리고 혼자가 되고싶다.
전세금도 빼고, 어딘가 홀로 골방을 구해 조금씩 말라서 사라지고 싶다.
끝없는 비참함을 느끼다 떠나고 싶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
그저 너는 평가할 뿐,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없다.
그냥 조금씩 말라가는 기분이다.

나는 얼기설기 얽혀있는 듯하지만, 하지만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다.
박사가 아니냐고 하지만, 현실은 백수이다.
똥은 다행히 잘 싼다. 글도 쓰고 있다.
누구에게도 도움되지 않고, 무료의 삶일뿐이다.

무료한 인간은 무료의 삶을 살 뿐.
소비사회에서 살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죽어있는 것이다.

아침이 되지만 시체의 밤이다.
죽어있지만 살아있다.
입에 들어가는 것도 아까워 식비를 줄이려고한다.
겉으로는 근검절약한 모습이지만,
사실 나는 나를 학대를 하고 있다.

너는 교통비도 아깝다.
따릉이를 타라. 차는 꿈도 꾸지말아라.
너는 아는 것이 없다.
주식은 보기만 해라.

돈을 다 쓰면 기분이 좋을까?
하지만 쓸 곳을 찾을 수도 없다.
좋아하는 것도 없다.
내가 꾸는 꿈은 너무 비싸다.
거대한 건물 따위이니.

말라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있나.
그저 프리랜서로 힘날 때 가끔 일하는 걸까.
하루 일하고, 삼일 쉬는 삶.
쪽방의 삶.

부모님은 알아서 사실 것이다.
그런데 나는 케어가 필요하다.
이해받고 싶다.
너무나 슬프다.

불과 어제 잘 살아보려고 꿈꾼 것이다.
힘을 끌어다써서인지
억압이 풀리고, 우울이 튀어나왔다.
그 안에는 희망이 잠들어있는가?

견뎌줄 사람이 필요하지만,
견디는 것을 보면 꼴뵈기가 싫다

모든 걸 그만두고 싶다.
있는 돈을 다 털어서
책을 사볼까.
싫다, 헛된 힘이 날 것 같아서.

하고싶은게 나야말로 없다.
롤모델 따위도 없다.
이뤄놓은 것도 우연일 뿐이다.
좋은 것도 잘하는 것도 없다.


위의 말들을 다 뒤집어놓으면,
행복이 있을 것이다.


많은 것을 소유하며, 함께 하는 이가 있다.
넓은 집도 사고, 한껏 성장하고 있다.
스스로와 타인에게 존중받고 이해받으며, 사랑받는다.
삶이 명료하고, 소속감이 있으며,
외적인 분위기에 걸맞는 학력과 직업이 있으며,
건강한 생산활동을 한다.
경험에 돈을 지불한다.
아침에 눈을 떠, 밥도 잘먹고, 차로 이동한다.
기업에 가치투자를 하고, 건물도 소유하고 있다.
안정적인 수입이 있는 직업과 주도적으로 일을 하며,
적절한 휴식도 취한다.
부모님도 챙기고, 이해하며, 유머러스하다.
늘 꿈이 있어, 일상에 힘과 희망이 넘치고
개방되어있어 활기차다.
타인의 힘듬을 함께 나눠줄 수 있으며,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다.
다양한 일을 조화롭게 수행하며, 책을 통해 소양을 쌓는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삶이 풍요롭다.
다음 일들이 떠오르고, 이상을 실현하며, 누군가의 이상이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좋아하는 것을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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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주의 : 인간은 외부자극에 대해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존재로 인식.
정신분석 : 인간을 생물적인 충동과 어린 시절의 갈등의 희생물로 인식.
성장심리학 (대부분 인본주의) : 
뿌리깊은 갈등 치유나 잠재된 재능/창의성/원동력/동기 등을 되살리기 위해, 앞으로 성숙할 수 있는 방향에 초점을 둔다.
과거의 정서적인 상처를 치유하는데 중점을 두지 않는다.
인간은 과거/본성/환경을 뛰어넘어 성장할 수 있으며, 또 성장해야만 하는 것.
(I think, 성장해야만 한다는 것.. 노오력을 말하는 것 아닌가? 이 간극 사이에 현실과 심리학이론의 연결점이 있을 것)
인간은 '정상성(normality)'을 초월해서 성장하고 개발할 수 있고, 잠재능력을 인식/실현/발휘하려고 노력해야한다.
정서적인 질환으로부터의 해방, 신경증이나 정신병적인 행동이 없는 것은 성장과 충족의 첫 걸음.
정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충분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성장할 수 있는 더 높은 경지, '초월성(supernormality)'을 상실하고 있는 이다.
우리는 인생의 여러 측면이 만족스럽게 충족이 되면서도, 괴로운 지리함이나 역겨움, 절망, 반감, 그리고 생의 무의미함 등 때문에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 우리는 때로 마치 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상실한듯이 인생을 포기해 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하며 그러면서도 무엇이 진정으로 문제점이 되는지도 알지 못하는 때가 있다.
(feat. 김조한, 사랑에 빠지고 싶다)

톨스토이 [참회록]
'무엇 때문에 나는 살아야 하는가?'
'나는 내가 늘 익숙하게 알아오던 나의 생애에서 무엇인가 파괴되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나 자신을 행복하고 건강한 젊은이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나 자신이 목매어 자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매일 밤 내가 외로이 잠자는 나의 침실에서 밧줄을 없애버리게 되었고, 나 자신의 생명을 총으로 끝맺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이상 사냥도 다니지 않게 되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나는 인생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는 내 생을 끝맺고 싶다는 충동에 몰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끝없이 생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정신이 이상하지도 않았고, 병을 앓고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에게서는 좀체로 발견할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정신적/육체적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내가 하고 있는 일의 결과는 무엇일까? 내일은 무엇을 향해 일을 할 것인가? 내 생애의 총 결산은 무엇일까? 왜 살아야만 하는가? 왜 일을 해야만 하는가? 필연적으로 닥쳐오는 죽음을 기다리면서 생명을 파괴하지 않아야 할만큼 인생에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것에 대한 알맞는 해답은 있지도 않으며,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끝없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건강한 성격은 무엇인가?
'의식적으로 자신이 이룩할 수 있는 가능성보다도 적게 노력한다면, 여러분은 남은 여생을 불행하게 보낼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매슬로우 1967, Neurosis as a Failure of Personal Grow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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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나 나나 울컥 올라온다.

그럼에도 나는 같이 울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당신이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서, 내가 주고 싶다.
나한테 기대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내가 한번 그 느낌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인지,
끝내 눈물이 터져나오지는 않았다. 한번 오열해보면 어떨까?

다뤄보기 어려웠던 감정을 다 쏟아내면 어떨까?

가득 쌓여있는 책을 새롭게 정리할 수 있게,

내 목에 있는 가래처럼, 끈적하고 더러운 그것을 뱉어내버리면 어떨까.

폐와 심장 그 어딘가에서 꿈틀거리는 그 느낌을 소리지르고 울어버리면 어떨까.

 

내면에 아이가 있다고 하는데,
그 때 그 아이에게 지금의 내가 한마디 해준다면,
안아준다면, 안아주면서 한마디 건넨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어떤 감정을 같이 느낄까?

난 그저 부둥켜안고 울어버릴 것 같다.

내가 미안해.
그녀의 외부의 대상을 세상으로, 세상을 나로 바꾼다.
더 좋은 세상에 살게 못해서 미안해.

내가 더 좋은 세상을 줄게.
더 좋은 관계를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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