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코드/Code of Life

살아있는 시체의 밤

Ask-How 2020. 6. 11. 09:49

내 감정은 다뤄지지 않았다.
밤새 헤맸다. 억압해놓은 것이 풀려버렸다.
하반신이 나체인체 수많은 사람 앞을 걷는다.
점점 가려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수치심을 배워간다. 그 과정에서 아무도 없다.
수치심을 숨기고 혼자 다뤄야했다.
그것이 어쩌면 큰 상처였을까.
밤이 끝나고 그동안의 방식으로 움직인다.

내 마음 속에는 다시 아무도 없다.
혼자가 되었고 유년시절이 재생된다.
말이 줄어든다. 아무도 모를테니.
감정도 줄어들고 심란함도 줄어든다.
반쯤 물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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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과 펄츠를 빌려온다.
어린아이의 욕망으로 젖가슴을 요구하지만
채워지지 않은 채 욕구가 되어 떠돈다.
늘 유지되던 마음의 체계가 무너져 혼란스럽다.
해결되지 않은 채 과제로 남는다.

맑스의 비유처럼 하나의 유령이 마음을 떠돈다.
죽은 모습으로 살아있는 욕구라는 유령이.

내 낡은 서랍 속에서 밀어넣었지만
억압한 마음을 이따금 구린내를 풍긴다.
얼굴은 긴장된다. 그것을 들킬까봐.
-


무언가 이룰 수 있는 때이다.
이 느낌을 기다린 걸까.
무언가 잃어버릴 것 같은 느낌.
불안하지만 침착해진다.

이제 선택할 시간.
이 에너지를 어느 과업에 집중시킬까.
위대해질 수 있을까. 부끄러움이 쫓아온다.
아니, 나는 그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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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러 가는게 아니야, 내가 정말 살아있는지 어떤지 확인하러가는거야."
역설적으로 죽으면서 살아있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어쩌면 지금 가는 길은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자기파괴적인 유혹이 든다.

취화선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어떤 그릇이 나오길 원하는가?", "어디 그게 도공 마음대로 되는가요. 불이 말해주는 것이지요."
youtu.be/EwQ1eYaVZZg
그 마지막 장면은 ‘장승업은 살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예술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http://literarynote.net/chihwa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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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사랑과 연대, 격려와 칭찬은 진정한 안내자인가?
무엇이 부족했는가.

살아있지 못했다.
실존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