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트 특급 살인
보기전에는 제목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
뭔가 특급 살인이 일어났다는 느낌인데, 원제는 Murder on the Orient Express
다보고 의미부여하면 제목이 더 와닿는다.
주인공인 푸아르 탐정은 두개의 달걀이 대칭을 이루지 않아서 밥을 못 먹고 한쪽 신발에 똥이 묻었다고 다른 쪽도 더럽히는 사람으로, 항상 질서와 체계, 동등함을 추구한다.
라쳇(조니뎁)의 식사를 같이하자는 제안을 선약 때문에 거절한 푸아로 탐정.
이후 티타임은 혼자 책을 보며 웃고 있자, 라쳇은 불쑥 찾아와 합석하며 말한다.
"You know, dessert is an indulgence, and I feel kinda silly and stupid indulging alone."
> 알다시피 디저트는 "맘껏 즐기도록 허락된 것"인데, 혼자 즐기려니까 좀 한심해보이더라구. (너처럼ㅋㅋ)
영감에 대한 조롱처럼 느껴지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조롱을 같이 하고 있다. 둘다 못나보이게 만드는 자학/가학적인 유머.
그런데 Indulgence가 카톨릭에서는 소위 면죄부로 알려져있는, "대사"의 의미가 있다. (죄에 대한 벌을 대신 사해준다.)
dessert는 죄의식에서 풀어주는 느낌일까? 당과 지방에 대한 불편감같은 것 말이다.
벌써 죄를 고백하고 있다.
과한 해석인가? 이후 대사에서는 라쳇이 탐정에게 "무고한 자의 복수자"라는 일을 '대신' 해주길 제안한다.
무고하냐는 질문에 자신은 "사업가"라고 한다. 감정인들이 잘못해서 문제가 생겼다며, 자기 잘못은 아니라고 한다.
한참 자기 고백을 하고 자신을 보호해달라는 라쳇. 탐정의 거절에 대해 돈으로 회유하고 총으로 협박하지만, 탐정은 그의 얼굴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다며 명확히 의견을 말한다.(자넨 이 영화 아니였으면 해적이였을거야...)
라쳇은 그래도 자기 케이크(어쩌면 고해성사)는 마음에 들었냐고 묻고, "Perfect"했다고 한다.
기차가 터널을 지나가다 쌓인 눈 때문에 탈선하고,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게 된 상황.
에스트라바도스(선교사)는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할지, 루시퍼처럼 떨어질지 주님 뜻에 달려있다는 말을 한다.
라쳇은 12개의 깊이가 다른 자상을 입은채 사망한다.
의심하며 갖가지 인종차별을 기반으로 투사하는 장면들.
탐정은 범죄자의 이상행동을 감지할 줄 안다. 영혼에 균열이 생길 정도가 돼야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믿는다.
[데이지와 관련된 이야기는 스포니까 어느정도 생략]
우리의 정의로움, 양심은 어디갔는가? 데이지(순결)의 죽음과 함께 죽어버렸고, 묻어버렸다.
상처받은 자로 대변되는 우리의 감정에는 치유가 필요하다. 안식, 구원이 필요하다. [12사도와 예수]
탐정으로 대변되는 우리의 이성은 불균형을 감당하는 법을 배워야한다.
* 찌르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의 자리에 있는 할머니인가? 종교적 해석은 내공이 부족하여 ..
이 영화는 정의와 구원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무엇을 '옳은' 것이라고 정할 것인가? 살인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
파스칼의 말처럼, 피레네 산맥 이쪽에서의 정의는 저쪽에서는 불의이다.
Orient : 해가 떠오르는 곳이기에 우리가 지향하는(Oriented) 곳이 되고, 근원적인(Original) 질문을 하게 만든다. 때로는 강렬한 태양에는 그림자가 길어지듯이, '서양인'에게 '동양'이라는 다른 지점은 때로는 불쾌한 자신의 어둠을 투사하여 차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Orientalism).
누군가의 Orient는 어떻게 Express(press out)되는가? 말/상징/행동, 혹은 (범죄)사건으로 드러난다.
표면적으로는 카세티의 죽음, 데이지의 죽음. 내적으로는 순결하고 소중했던 마음의 죽음.
그 과정에서 얼어붙고, 탈선된 사람들. 이들에게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대신 용서(대사)를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가 지향하는(할) 곳을 명확하게 해줄 사람, 태양/구원을 향하는 급행열차를 태워줄 사람이 필요하다.
Orientation : 지남력의 뜻도 있었다. 한 인간이 일상생활을 건전하게 영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처해 있는 입장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주위 환경 중에서 특히 자기가 처해있는 공간, 시간 및 상대하고 있는 사람을 구체적으로 인지하는 능력을 지남력(orientation)이라 하는데, 이것이 상실된 상태를 지남력상실(disorientation)이라고 한다. 예컨데, 교실에 앉아 있으면서 극장에 앉아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면 공간에 대한 지남력을 상실한 것이고,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밥 을 왜 안주느냐고 한다면 시간에 대한 지남력을 상실한 것이며, 자기 어머니를 보고 누이라고 부른다면, 이는 사람에 대한 지남력을 상실한 것이다. + 내 생각 > 나는 누구인가? 나의 오리지널이 만약 타인의 오리엔트에 의해 흔들린다면, 지남력상실의 위기-푸아로 말에 따르면 영혼의 균열-에 놓인다. (https://m.blog.naver.com/sandi3303/90101004515, 이정균, 1992: 107, 정신보건사회복지실천론 등- 확인해봐야함). |
자 이제 우리의 이야기로 가져와보자.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지남력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움직여야하기 때문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태양을 바라본다. 어디에서 떠오르고 있는가? 그곳이 동쪽이다.
안을 정했기에 밖이 있듯. [법륜스님의 스승님의 가르침] 동쪽을 정했기에 서쪽이 정해졌다.
그리고 그것에 비해 한없이 작고 초라한 자신을 발견할 때, 죄책감을 느끼거나 분노가 나타나지 않는가?
우리는 방향을 정하고 싶은데, 이것이 사회 정의라고 하면 어려움이 발생한다.
정의롭고 질서가 있으면 좋겠다. 공평하길 원한다.
한 쪽을 정하면, 그것은 따르게 된다. 반대는 거짓,불의,악,왼손잡이,다른 지역의 사람이 된다.
그러나 내가 그의 입장에 서면? 이전에는 동쪽은 서쪽이 되고, 입장이 바뀐다.
내가 죄스러운 마음이 되고 그의 두려움을 공감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장막 속에 있다면, 어디를 지향해야할지 모른다면, 나는 무엇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말은 다시 돌아와 나를 죄인, 못난 사람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존 롤스, 무지의 장막]
그렇다면 어떻게 평화, Peace에 도달하는가? [Pax 평화의 여신, 범(汎), Pacfic 태평양]
세상을 돌다보면 만나는, 거대하고 평화로운 것. 아마 그것은 평평한, 보편적인 가치일 것이다.
자 이제 그럼 방향에서 높낮이로, 꼭 평평할 필요가 있나? 모난 곳은 산이기거나 골짜기이다. 독특성도 중요하다.
삶의 편함도 좋지만, 굴곡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 탐정은 왜 그렇게 정의를 고수하는 것일까? 아내와의 일이 있겠지? 나일강의 죽음에서 확인할 수 있길.